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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월 07일 금요기도회 예배문

03월 07일 금요기도회 예배문

사도신경

찬송 - 예수 사랑하심은 (찬411, 새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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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기간부터 오늘까지 금요기도회예배문으로 가정에서 개인의 삶으로 함께 예배 드려 주신 성도님께 감사합니다.

  오늘로 금요기도회예배문이 마쳐지고, 이제는 3월 14일(금)~6월 27일(금) 늦은 8시부터 교회 3층 중예배실에서 금요영성기도회로 예배드리며 기도하는 시간으로 만납니다.

이후로 두 달 동안 무더운 여름은 금요기도회예배문으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오늘도 금요기도회예배문 속 말씀을 붙드시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회개로 자각되고 옛 자아를 부수시고 허무신 후에 다시 건설해나가실 하나님을 구하며 소망하시는 한 주간 되시길 기도합니다.  

성경본문 역대하 7:14

유다와 달리 베드로는 사도행전 3장 19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회개’하고 ‘돌이켜’ 실제적인 생각의 변화와 동반해서 삶을 돌이키는 회개를 했습니다.

경험한 후에 확신을 가지고 선포하면 다녔습니다.

 

말씀에 의해, 예배를 통해 마음에 찔림이 있고, 감동이 있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감정적인 시간으로만 보내면 안됩니다. 실제적인 방향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부흥의 전제조건으로써 회개의 의미를 몇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1. 회개는 자신에 대한 자각의 문제입니다.

한 참 유치원, 어린이집 학대가 이슈가 되었던 시절, 한 유치원에서는 cctv를 설치하고, 일과 후에 선생님들이 한 자리에 모여 그 날 일과를 모니터링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합니다.

선생님들은 어린이들과 함께 했던 하루를 복기하며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한 선생님은 ‘평소에 생각하던 내 모습과 영상 속의 내 모습이 너무 달랐습니다.’라며 놀랐고, 다른 선생님은 ‘화면 속에 나는 펜으로 책상을 탁탁치거나, 칠판을 손으로 치며 이야기했다. 나도 모르게 허리에 손을 얹거나 팔짱을 끼거나 뒷짐을 지곤 했다.’

아이들 앞에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모습을 자신도 모르게 내비친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한 선생님은 ‘내가 유독 한 아이만 예쁘다고 안아주거나 뽀뽀해 준다는 걸 깨닫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니까 선생님 본인만 모르고 주변은 다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 아이를 편애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요?

무엇이 회개입니까?

그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했던 자라 말하는 다윗도 죄를 범하고 1년 가까이 자각을 못했습니다.

그런 다윗에게 나단을 보냈고, 하나님께서는 다윗으로 하여금 타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다윗이 자신의 죄악을 자각하고 괴로워하며 쓴 시가 시편 51편입니다.

3절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한 순간 타락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본질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5절을 보면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그러니까 종류와 빈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 모두가 다 죄인임을 깨닫는 것. 자각하는 것. 이것이 회개라는 것입니다.

타인의 죄악을 보며 비난하고, 나는 아닌 것처럼 행동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신앙생활은 없습니다.

 

항상 경계하며 하나님 앞에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야합니다.

다윗은 더 이상 죄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 일 후에 여전히 죄 앞에 있는 존재가 자신임을 알았기 때문에 철저하게 타자의 시선으로 살았던 이유에 타락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왜 자각하지 못합니까?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고 싶은 것입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평가하며 냉철하게 바라보아야 하고, 볼 수 있지만, 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 기회 주실 때, 자각의 자리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2. 회개는 옛 자아의 파괴의 문제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비둘기를 파는 등, 장삿속을 만든 것에 대하여 격분하십니다.

예수님 공생애 중 가장 화를 내신 일 중 한 사건일 것입니다. 상을 뒤엎고 채찍을 휘두르시며 격분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2장 19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그리고 누가복음 21장 5~6절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성전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과 예수님의 시각이 너무나도 다릅니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다 허물어져야 한다는 시각입니다.

무엇이 회개입니까?

오늘 우리가 회개한다 할 때 철저하게 무너뜨려야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장 10절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세우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 말씀과 똑같은 순서 아닙니까?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무엇입니까?

먼저 허물어야, 철저하게 무너뜨려야 다시 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이야기는 인간들이 끝간데 없이 추구하던 과시 바벨탑이 무너진 후에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역사를 이끌어 가셨습니다.

 

왜 우리 안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안보이는 것 같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추구하는 바벨탑이 안 무너졌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닐까요?

진정한 회개가 왜 안 일어납니까?

아직도 내 안에 무너뜨리고 싶지 않은 내 자아가 있기 때문은 아닙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이 추구하는 그 어떤 바벨탑, 포기하지 못하는 그 것. 그것이 무너질 때, 하나님께서는 다시 세우실 것입니다.

 

사도행전 15장 16절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현실적으로 타락과 변질이 보여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보며 한 숨 짓고 있지만, 언젠가 주님이 오셔서, 우리가 무너뜨린 다윗의 장막을 하나님께서 다시 건설하실 것을 소망하며 기다리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허물어라 말씀하실 때, 순종하여 다시 세워지는 날을 살아가시길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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